[중앙 칼럼] 한류는 있는데 한인타운 정체성은 없다
최근 타주에서 놀러 온 타인종 친구와 리틀도쿄의 재패니스아메리칸 뮤지엄을 둘러본 후 리틀도쿄 빌리지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를 데리고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베버리 불러바드를 타고 다리를 지나는데 대형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큰 아치 모양의 게이트웨이로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이라고 적혀있었다. 조수석에 앉았던 친구가 탄성을 자아냈다. “정말 멋진 조형물이야!”라고. 그도 그럴 것이 조형물은 30피트 높이에 폭 82피트의 위용을 자랑하며 6차선 도로를 품듯이 서 있었다. 바로 전날 차이나타운으로 식사를 갈 때도 등용문을 보며 감탄했던 친구의 모습이 데자뷔처럼 뇌리를 스쳤다. 등용문도 43피트 높이에 폭 80피트의 대형 철골 구조물로 맨 위에는 두 마리의 황금색 용이 여의주를 마주 보고 있는 다운타운 차이나타운의 랜드마크다. 중국 이민자의 역사를 기념할 목적으로 2001년에 세워졌다. 한인타운으로 들어섰다. “한인타운에 있는 한국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조형물을 보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난감했다. 차이나타운이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필리피노타운과 같은 게이트웨이를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다. 애써 한류와 한식으로 그의 관심을 돌렸다. 내년은 미주한인이민 120주년이다. 올해 중간선거에서는 앤디 김 연방하원의원이 뉴저지에서 3선에 성공했고 남가주의 미셸 스틸과 영 김, 워싱턴주의 메릴린 스트릭랜드 연방하원의원은 재선 의원이 됐다. 한인 이민역사가 시작된 하와이에서는 처음으로 한인 부지사도 선출됐다. 실비아 장 루크 부지사가 주인공이다. 한인 정치력 신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다. 한인사회의 경제력 성장도 괄목할만하다. 자산 규모 190억 달러가 넘는 한인 최초의 리저널뱅크는 물론 억대의 순자산을 보유한 한인 부자도 많다. 이에 더해 한국의 문화와 음식은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그런 지금도 한인타운의 정체성을 알릴만할 것이라곤 올림픽 길에 있는 청사초롱 모양의 가로등과 ‘KOREATOWN’이라고 새긴 둥근 구모양의 딱히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표지석, 그리고 흐릿해져 잘 보이지도 않는 한국 전통문양이 새겨진 건널목 정도가 고작이다. 한인이민 역사를 기리고 한인사회를 대표할만한 랜드마크 부재는 이민 120주년을 맞는 내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인사회의 숙원사업이라는 ‘코리아타운 게이트웨이 프로젝트’가 최근 재추진되고 있다. 타운 중심지인 올림픽 불러바드와 노먼디 애비뉴 교차로의 다울정 옆에 LED 아치형 게이트를 세우는 360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다. 2008년 프로젝트가 처음 시작된 이후 무산과 재추진을 반복하다 지난 8월 에릭 가세티 LA 시장이 승인을 하면서 재추진 동력을 얻었다. 그러나 중도에 또 무산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과연 그 게이트웨이가 한인타운 상징물로 적합한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상황이다. LA 시정부 소유 주차장을 무상으로 임대받고 LA일본총영사관과 재력가의 지원,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주민 전체가 힘을 보탠 리틀도쿄의 커뮤니티센터인 테라사키 부도칸이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이민 120주년인 내년에는 한인 정치인과 재력가들은 물론 한인사회가 힘을 합쳐 우리 자녀에게도, 그리고 타인종에게도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기념비적 상징물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인타운의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않는다면 한인타운은 리틀 K타운으로 축소되거나 히스토릭 코리아타운이라고 써놓은 도로 표지판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후세에게 부끄러움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말이다. 진성철 / 경제부장중앙 칼럼 한인타운 정체성 한인이민 역사 한인 이민역사 히스토릭 필리피노타운